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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c/…ing

약속(約束)

은유니 2013. 3. 7. 10:43

1.



푸드득, 무언가를 떨쳐버리듯 날아오른 새의 날갯짓소리가 허공에 흩뿌려졌다. 먼동이 트는 붉은 빛을 향해 날갯소리는 점차 멀어져가더니 이내 공기를 가르며 떠나가는 그림자와 함께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쉬이 사라지지 않는 무게감으로 오래간 자취를 남겼다. 적황색 지평선 위로 일렁이며 솟아오르는 기운이 더해져 지나간 긴 흔적을 발갛게 물들였다. 새벽의 짙은 내음에 깨어난 그는 발밑으로 자박자박 밟히는 그 흔적을 잠시 동안 경이로운 듯 쳐다보았다.

그가 생명의 소리를 들었던 것이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제대로 떠오르지 않았다. 드문드문 이전의 기억들이 불현듯 스치고 지나가곤 하였으나 신경 쓰지 않게 된 지 오래였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무릎을 굽혀 발밑의 흙을 한 줌 쥐어들었다. 스르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붉은 잔해가 이미 시계(視界)에 잡히지 않는 먼 날개의 움직임을 들려주었고, 그는 온몸에 전율을 느끼며 머릿속으로 그 소리를 상상해보았다. 원했던 만큼 잘 울리지 않았지만, 그 이외의 다른 무엇이 이곳에 잠시 머물러갔다는 사실만으로 그는 만족했다.


혼자 지내는 시간이 쌓여갈수록, 잊어가는 것이 많은 법이었다. 옷자락을 붙들고 늘어지던 그 모든 것들은 이제 손에 쥘 것이 없어졌다는 것을 깨닫고 어깨를 으쓱하고는 제 갈 길을 떠나가고, 저릿저릿 밀려오던 무언가의 그림도 어느 순간부터 훌훌 털어져 나갔다. 그러고 남는 것은 그라는 존재 하나 밖이었고, 세상을 덮고 눈을 감았다 뜨는 것 이외에 달리 그가 해야 할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처음에 그걸 깨달았을 땐 심장이 비어버린 듯 공허한 씁쓸함이 입안 가득 밀려왔지만, 점차 점차 자신의 일부로 그 ‘텅 비어있음’을 받아들이게 되자 그는 도리어 편안해졌다. 시선 닿는 모든 방향으로 펼쳐진 지평선에서 그러한 변화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그런 그라고 하더라도 타 생물의 움직임에 마음이 동하지 않을 리 없었다. 온 몸을 휘감아 통과한 그것의 꿈틀거림에 새삼스레 과거가 되어버린 감정을 명하여 떠올리게 되었다.

 
그것은 아련함이었다.

 
잔잔한 가루가 두 손으로 흘러내렸으나 그는 흘러가는 것들에 별 미련을 갖지 않고 그대로 두 손에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자연히 떨어지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마침내는 불어오는 바람에 날갯소리마저 희미하게 옅어지자 그는 못내 아쉬운 듯 그 흔적만이 남은 장소를 뒤로하고 길을 나섰다. 어딘가를 향한다 할 수 없는 발걸음으로, 그는 새벽 공기를 안으며 지평선 밖을 걸었다.





2.



빛은 이내 사그라져갔다. 지상의 생명들이 그 빛을 채 다 머금지 못해 시들어 가지만 이미 힘을 잃어버린 그것은 제 갈길을 재촉할 뿐이었다. 발갛게 달아올라 옹송그리던 모래들은 또 다시 쉽게 식어 그 표면에 얼음 결정이 맺히어갔다. 별 하나 보이지 않는 하늘 아래 얼음은 더욱 강하게 그의 발끝을 자극했다. 그러나 그는, 회갈색 먼지 날리는 풍경에 자신을 녹였듯 그 경계 없는 어둠을 망연히 그 눈 안에 담았다. 자박자박 걸음을 이어가던 그의 손끝에서 어둠이 둑둑 떨어져 나갔다. 발 아래 한데 엉킨 하릴없는 흐름의 자국은 채 인지하기도 전에 녹아 사라졌다. 아니― 드문드문 떠오르던 그의 기억 속에 스미었다. 몇 번을 어둠과 빛 속을 오가며 발걸음에 치인 기억은 무채색으로 변하여갔다. 시간이 다시 한 번 깊게 숨을 들이 쉬자 어린 밤이 만들어낸 노래 소리가 그 사이로 새어 나왔다. 조곤조곤 저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며, 갓 깨어난 밤이 웃었다.

 
‘너는 그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거니?’

 
어둠의 자취를 따라 공허한 마음의 길이 비추어주는 어딘가를 향하던 그의 발걸음이 멈추어 섰다. 난처하다는 듯 그는 작게 웃었다. 머리맡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덩달아 움직였다. 지나가는 것이라야 아무것도 상관없었다. 더 이상 그러한 것들은 그의 옷깃을 붙잡지 않았다. 선득 떠오르는 장면들은 사막과 어둠의 고요한 속삭임 속에 잠이 들었기에, 그는 이내 그러한 것들을 잊어버릴 수 있었다. 마음을 비워내는 것 역시 그것과 하등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비웃는 듯한 어조로 밤이 소리했다.

 
‘존재하지 못하는 것을 그 탓으로 돌리지 마. 그것도, 너도, 실은 여기에, 이곳에 없어.’
 
그렇지 않아? 여기에 내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은 실재가 아니니까.


그는 이번엔 그것을 무시하고는, 망설이지 않고 걸음을 옮겨나갔다. 어찌하였든 함께 스치듯 지나갔었다는 것은 분명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모래의 망망대해에 잠깐 떠올랐던 붉은 잔해가 그의 손 안 가득 뭉글거리며 피어올랐었다. 뒤로 늘어지는 모래의 그림자가 그려내던 모양은 분명― 장미였다. 과거에 언젠가 이 곳에 흐드러지게 만개했었다는 붉은 노을을 담은 빛이 어스름한 그림자에 기대여 보였다. 날갯소리는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었던가. 이곳에서 누군가는 전설을 만들어내며 그 ‘생애’를 태우고 있었다는 것을. 오직 그가 바라는 것은 그것뿐이었지 않나. 제 삶을 느껴보는 것. 인공 장미가 아니라, 그 연약한 줄기 위해 하늘거리는 꽃잎을 피어내는 것.

 
‘너는 그것이 너의 기억이라고 믿는 거니?’
 
꺄르륵, 우습다는 듯한 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3.



무의식적으로 그는 움찔 놀라며 눈을 떴다. 아직 새벽녘이었다. 어슴푸레 지평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으나 해가 뜨기엔 이른 시각이었다. 그러나 그는 눈 안에 가득 나리우는 밤의 자락을 벗어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곤히 잠든 세상은 아직 일어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듯 했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엇이 그가 눈을 뜨도록 하였는지 분명치 않았다. 아직 새벽은 제 내음을 채 다 그러모으지 않고 얌전히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는 물씬 노인의 분위기가 나는 밤이 느릿느릿 멀어져가고 있을 뿐이었다.
 
어깨를 으쓱하고 다시 그는 자리에 누웠다. 날이 밝아오면 그때야 주변을 살필 겨를이 생길 것이다. 검푸른 하늘이 다시 그의 두 눈덩이를 지그시 눌렀다. 잠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미 오랜 습관이 되어버린 탓에 몸이 필요로 하든 그렇지 않든 시간에 맞추어 자는 것이 깨어있는 것보다야 익숙했다. 눈꺼풀 안의 어둠 속에 잠겨 들던 그는 돌연 다시 눈을 떴다. 먼젓번에는 확신할 수 없었으나 이번에는 분명했다.


 
그것은 분명 날갯짓소리였다. 허공을 가르며 나아가고 있을,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새의 울음소리였다.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점점 밝아오는 동녘을 향해 무심코 달려 나갔다. 그러나 좀처럼 소리는 가까워지지 않았다. 다 털어졌다고 생각한 그 무언가의 아련함이 턱 밑까지 솟아오르더니 질끈 깨문 입술 사이로 새어나갔다.

 
그것은 그리움.

 
생명은 모두 다른 살아있는 것의 숨을 그리기 마련인지라, 움직이지 못하고 뿌리내린 것들마저도 제 마지막 한 줄기의 용기만큼은 바람을 태워 떠나보낸다. 그런 말 못하는 이의 한을 담은 것들도 온기와 붉은 줄기를 찾으려 하는데, 하물며 제 의지로 여행하는 그것이라고 하여 그런 그림이 없을 것인가. 조금이라도 닿아 있는 것을 향해 맞바람의 코웃음을 듣게 되더라도, 나아가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어머니의 품을 그리워하며, 같은 피가 흐르는 생명을 기리는 마음. 지상의 모든 이들이 지니며 태어나는, 태곳적부터의 아련한 마음 한 조각.

 
‘너는 그것마저도 사랑이라 명하고 싶은 것인가.’
 
 
이젠 서녘으로 길게 늘어져 그의 등 뒤로 멀어져가는 밤이 그림자가 어린 목소리로 말하며 웃었다. 그걸 듣는 순간 그는 자신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멈추어 있던 고동이 살아나려 하고 있었다. 애초에 움직이는 법을 알지 못했었던 그것이 처음으로 고동치는 법을 깨달은 듯 힘차게 뛰고 있었다. 다른 심장소리가 그 속에 섞이어 들었다. 그 심장을 타고 온 몸으로 퍼져나가는 뜨듯한 피의 흐름에 그는 조금 어색한 듯 달려 나가던 속도를 늦추었다. 뜀박질 소리가 잦아들자 더욱 선명하게 들려왔다. 두근. 두근. 자신을 태울 줄 아는 불꽃의 순수한 울림. 그는 뛰어나가던 이유조차도 잊고 그곳에서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갓 태어난 아이의 숨소리를 살피는 듯 조심스럽게.





4.



기억하고 있니, 사실은 이곳이 온통 푸르고 붉은 색의 현현이었어. 모두가 이 곳에서 꿈을 먹고, 세상을 꿈꾸며 잠들곤 했었단다. 매일 매일이 놀랍고 신기한 것 투성이었지. 하늘이 푸르다는 걸 잊지 않고 있는 이가 얼마나 될 것 같니? 잎사귀를 스치는 투명한 바람의 맑은 온기를 느껴본 이가 몇이나 될 것 같니? 너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는 그 모두를 알고 있단다. 잊지도 않고 붙잡고 있단다. 마지막 남은 그들의 목소리를 지키기 위해 이렇게.

 
사실은― 그것 때문에 네 곁에 머물러 있지 못해. 인공(人工)이 아닌 자연(自然)을 기리는 우리는 몸 구석구석을 흐르는 우리들의 시원(始原)의 움직임을 멈추는 것을 용서하지 못해. 너는, 잃더라도, 잊더라도, 지키려 했던 것들을 완전히 놓지 말아야 해.
부디.





5.



“그게… 무슨 의미이지?”

 
떠오르는 새벽이 밤을 대신해 대답한다.
 
‘네 심장이 가리키는 그것. 네가 놓지 못하고 찾아 헤매는 그것. 너를 여기까지 오게 한 그것.’
 
혼란스러운 그의 눈이 검붉은 잔해를 떠올렸다. 회색의 거리를 떠나오게 만들었던 누군가의 최후의 미소. 그리고 이내 사라져버린 그의 생명의 속삭임.



 
‘그것이― 생명이라는 거야.’






:고삼 때 쓴 글 방출!!!ㅋㅋㅋㅋㅋㅋ 아 부끄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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