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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ol y Luna - 2화. Puella (푸엘라) : 소녀]

by.타로





소녀는 말갛게 빛나고 있는 정령들에게 나지막한 노래를 들려주고 있었다. 은은한 달빛처럼 내리쬐는 빛이 우거진 숲을 뚫고 들어가 겨우 닿은 얼굴은, 살짝 내리깐 은빛 눈썹과 그 아래로 투명하게 빛나는 사파이어빛 눈동자 때문인지 깨질 듯 투명해 보였다. 소녀는 분명 그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었지만, 희미한 음은 정령들이 그녀의 주변을 맴돌 정도로 아름다운 것이었다.


두근두근.

소녀는 갑자기 느껴지는 심장박동과 미세한 통증에 고개를 들었다. 열에 들뜬 듯 심장은 쉴 새 없이 뛰었다. 마치 누군가를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 같았다. 소녀는 심장이 애타게 부르는 그것을 찾아 눈을 돌렸다. 그리고 부서지는 듯한 태양빛을 등지고 이쪽을 바라보는 금빛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소녀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안녕, 내 이름은 루시엔이야. 너는?”


소년이 발소리를 죽이고 조심스레 다가오며 물었다. 사람은 싫었다. 늘 처음엔 친절한 듯 다가오는 위선자들. 소녀는 대답 없이 정령에게 시선을 돌렸다. 나지막한 그 빛을 어루만지려는 순간, 정령들이 파란 기운을 내뿜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루시엔’ , ‘태양의 루시엔’. ‘강하다’ , ‘강한 오오라’ , ‘부족해…’.




정령들이 왠지 들뜬 듯해서 소녀는 그를 다시 쳐다보았다. 금빛이 태양을 가져다 놓은 것처럼 아름다운 소년이다. 선한 눈매와 금빛 눈동자, 그리고 태양빛으로 올을 짠 듯한 금발 머리. 분명 소녀는 잡목이 우거진 그늘에 숨어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늘이 밝아져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말을 못해…?”


루시엔이 놀란 듯 물어보더니 금새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 몰랐어. 아... 하지만 고의는 아냐!”





소녀는 정말 미안한 듯이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오해하지 말라는 듯 분주히 손을 내젓는 그의 모습이 왠지 이상해 보였다. 묘하게 재밌는 사람이다. 그러나 정령이 도망치지 않는 것을 보아 진짜 인간은 아니었다. 헌데 어째서- 저렇게도 인간적이고 맑은 웃음을 지을 수 있는 것일까- 하고 소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너는 누구지…? 그보다 이 두근거림은 무엇일까.’


루시엔은 소녀의 침묵을 용서로 받아들였는지 곧 밝게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우리, 손짓 발짓을 모두 사용해서 대화할래? 물론 나는 말로. 두 사람 다 말이 없으면 심심하잖아.”





루시엔은 말을 마치며 엄지와 검지를 딱 마주 붙이며 웃었다.


[알았지?]


소녀는 그다지 벙어리 행세는 할 마음은 없었지만, 이 상황이 재밌게 느껴지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저도 모르게 엷게 미소 지었던 걸까, 소년이 옅은 홍조를 띄우며 손가락질을 했다.

“어? 웃었다.”







어느새 뿌옇던 새벽빛이 물러가고 아침 해가 숲 꼭대기에 걸렸다. 왠지 루시엔의 머리가 더 반짝거리는 느낌에 소녀는 그의 금발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소년은 쉴 새 없이 말했다. 아, 물론 손짓과 함께.



오른손을 심장에 대었다 띤 다음, 검을 쥔 동작을 하더니 두어 번 교차시켜 베어 내린다.


“난 요즘 검술을 배우고 있는데”


경례 포즈를 취하다가, 양 손을 교차시켜 X를 만든다. 그리고 양 손을 흔들더니 뭔가를 치우듯 밀어내는 동작을 만든다.


“사부님은 정말 괴팍해. 제자에게 하기 싫은 일은 다 떠맡기질 않나”


검지 손을 오른 눈에 대더니, 어깨를 으쓱해버린다.


“눈치는 또 얼마나 빠르신지 거짓말은 통하지도 않는다니까.”





소녀는 그 모습을 보며 몰래 쿡쿡 웃었다. 루시엔이 생각하는 소녀는 말을 못하는 사람이지, 소리를 못 듣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가 손짓을 이용하는 것은, 그것이 둘 만의 약속으로 정해져 버리기 때문일 거라고 소녀는 짐작했다. 소녀는 어렸을 때부터 기억력이 남다르게 좋아서, 한 번 기억하려 마음먹은 것은 절대로 기억할 수 있었으니까 불가능하진 않았다. 그래도 새벽부터 태양이 하얗게 가지에 걸려 금빛을 수놓을 동안, 저렇게 열심히 모든 동작들을 취하고 있는 소년이 신기했다. 소녀에게는 처음 경험하는 유형의 인간이었다. 아니- 인간다운 어떠한 소년. 아니……



‘루시엔이야.’





소녀는 그렇게 생각했는지 한결 부드러워진 눈매로 루시엔을 응시했다. 이렇게 빠른 시간 내에 처음 친해진 친구이다 보니 편안한 느낌도 들었다. 소년의 그 열정에 어느새 그와 손짓으로도 대화할 수 있는 사이가 된 것이 다소 놀랍기까지 했다. 소녀는 자신도 양 손 다 약속 표시인 손 모양을 하고는 왼쪽의 새끼손가락을 오른쪽 엄지에 붙였다.


[그래도 괜찮은 분이겠지?]





루시엔이 킬킬 웃었다.


“그래도 마음속으로는 꽤 따뜻한 생각을 하고 계실거야. 좋은 분이야. 어렸을 때 버려진 날 데려다 길러 주셨거든…….”





마지막 대사는 손동작을 생략했다. 루시엔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이제는 중천에 떠버린 태양을 향해 멍한 얼굴을 했기 때문이었다. 루시엔은 순간 얼굴이 창백히 질리더니 중얼거렸다.


“맙소사, 생각해 보니 정오 전까지 오라고 하셨던 것 같아.”

그는 소녀에게 아쉽다는 듯 미소하고는, 특별 코스- 특별 코스- 하고 두려운 듯 여러 번 되뇌었다. 소년은 등 뒤에 꽃혀 있던 검을 꺼내더니 허공에 문 모양의 사각형을 그렸다. 사각형은 눈이 부실 정도로 빛을 내더니, 곧 하얀 빛을 내는 시공간으로 변했다. 루시엔은 소녀에게 ‘내일 보자’며 손을 흔들거렸다. 그러다가 두 발을 문 안쪽으로 다 들인 찰나에 문득 생각난 듯이 말을 꺼냈다.





“아차, 경황이 없어서 못 꺼낸 말인데… 이름이 뭔지 물어도 될까?”


루시엔은 손으로 허공에 ‘name’이라는 글자를 쓰며 물었다.





소년은 점점 투명하게 사라져가는 루시엔을 응시하다가, 그가 보이지 않을 만큼의 자그마한 미소를 띠고는 대답했다.





“시리아.L.유리에.”





흰 빛과 함께 소년의 할 말을 잃은 듯한 표정이 사라졌다. 시리아는 왠지 한참이나 덩그러니 앉아 있다가 쿡쿡 웃었다. 왠지 모르게 계속 웃음이 새어나왔다. 시리아는 고작 몇 시간 동안 많은 것을 채운 소년의 존재감이 사라져 버리자, 가슴 한 쪽이 아련히 쓰려옴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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